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비 제국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구도 ===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오스만 제국|서쪽의 대제국]]과 힘에는 부치지만 나름 호적수로 활약하면서 흡사 예전의 로마 VS [[사산조 페르시아]]를 방불하게 하는 형세를 유지했다. 사실 사파비는 인구에서 오스만에게 열세였다. 오스만의 전성기 인구는 3000만인데 사파비는 1000만은 커녕, 500만도 안되는 464만에 불과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320만에 불과했다. 본래 고대 문명의 요람 중 하나인 이란 지방이었지만, 몽골의 침략과 [[호라즘]]의 멸망을 거치며 250만의 인구를 보유했던 현대 이란 지방이 피난과 기근 등으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25만'''이 되어 버릴 정도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 학계에서는 몽골이 침략하기 전의 호라즘 제국이 지배하던 이란의 전체 인구를 500만, 몽골에게 학살당한 순 사망자만 170만명으로 추산한다. 본래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방과 우즈베키스탄의 이란 문화, 특히 이란계 언어는 몽골 제국이 투르크계 유목민을 놔두고 이란계 도시민들을 학살하면서 파미르 고원의 일부를 빼고는 완전히 사멸한다. 기원후 6세기의 사산조 페르시아도 인구가 800만이었다! 특히 이란이 과거의 성세에 가까운 인구를 회복한 것은 '''20세기'''에나 가능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에게 8배나 열세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에 달했다.] 사파비보다 사정은 더 좋지 못했다. 특히 로마군의 공격에 수도가 2번이나 파괴되었을 정도.[* 이는 사산조의 전대 왕조인 파르티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인구가 사산조처럼 1천만 이하였고 로마에게 수도가 3번이나 파괴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물론 '게르만족에게 [[동로마 제국|서쪽 지역이 함락된 이후의 로마]]'로 비교 대상을 바꾸면 사파비와 달리 사산조는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 애초에 건국 과정도 오스만은 오스만 베이의 건국 이후 [[4차 십자군]]이 남긴 옛 동로마 세계의 거대한 공백을 차지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으로 등극까지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정복과 팽창을 거듭했지만,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기원 자체도 [[사파비야]] 종교 집단이였고, 오랜 기간 [[일한국]], [[티무르 제국]], [[백양 왕조]] 같은 더 강력한 이웃 유목 정복 제국에게 의존하고 치이면서 아제르바이잔 산구석에서 겨우 겨우 세력을 키우면서 건국을 했더니 또 바로 서로는 오스만, 동으론 우즈벡이란 강력한 이웃 열강 상대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다. 지정학적 여건이나 세력 기반이란 측면에서 여러모로 사파비조 페르시아가 원래 더 불리했던 셈이다. 물론 예전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하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고[* 실제로 사산 왕조와 사파비 왕조가 추구했던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케메네스는 인구부터가 넘사벽으로 심지어 최대 3000만이라는 약간 황당한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중동에서 인구부양력 높은 지역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시리아,아나톨리아가 '''사천왕'''이라 할 만한데, 아케메네스는 이 모든 지역을 완전히 다 차지한 나라였으나 사산조는 메소포타미아만 차지했고 사파비는 하나도 점유하지 못했다.] [[사산 왕조]]와 비교하면 서쪽 전선은 영 딸리지만, 동쪽 전선은 의외로 유목 세력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자랑했다. 오스만 쪽 전선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페르시아의 역량은 [[로마 제국]]-[[파르티아]],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사파비 페르시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력에서 열세다보니 이란권이 힘에 부쳤던 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쳐들어온 꼴이었기 때문. 사산조와 비교해보면 전적이나 영역이 묘하게 동쪽으로 치우친 상황. 그러나 밀리긴 했어도 밀리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또한 크게 고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여전히 지중해 제국의 무시 못할 강적의 위치는 유지했다. 사산조와 직접 비교하기엔 8백년이라는 엄청나게 큰 시간적 차이가 있고, 지정학적 구도만 비슷하지 내부적 여건 같은 건 완전히 달랐기에 부적절하다. 왜냐면 사파비는 오스만 제국에 비해 여러 악조건에서 시작했다. 애초에 기반이 된 페르시아 내륙 자체가 오스만 제국의 풍요로운 루멜리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해안지방 같은 지중해의 곡창지대에 비해 생산력도 낮고 사막도 넒으며, 적어도 핵심 영토인 루멜리아-아나톨리아 해안-시리아-이집트는 확실하게 원활한 교통, 무역망이 개발 되었던 오스만과는 대조적으로 페르시아의 핵심 영토들은 [[자그로스 산맥]], [[알보르즈 산맥]], [[카라쿰 사막]] 같은 거대한 자연장벽으로 뚝뚝 떨어져 있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은 오스만 제국에게 침공당했을때 주된 대응인 청야전술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국가 발전의 관점에선 영 불리한 입지였다. 거의 천년전 마지막 페르시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내세운 사산조도 사실 이런 여건 때문에 인구와 세수의 핵심은 사실 현대 이란보다 이라크의 메소포파미아 일대에 있는 [[크테시폰]] 같은 지역이었고, 이런 그나마 인접한 대규모 영농과 인구 부양이 가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기 힘들었던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물리적 체급 자체에서 오스만에 비해 많이 딸렸다. 이런 악조건에서 그나마 어느정도는 호각지세를 유지하며, 국체를 보존하고 후대 이란의 정체성에 큰 구심점을 마련할 만큼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니-시아파의 지정학적 대립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사파비 왕조가 페르시아 문명과 이슬람권 전체에서 남긴 역사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튀르크 계통의 [[키질바시]][*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튀르크 부족들의 통칭. 'Qizilbash'라는 말을 직역하면 '붉은 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그들이 즐겨 쓰던 붉은 모자에서 유래했다. 사파비 왕조 창건 이전까지는 소수파였던 시아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창건자 이스마일을 군주이자 교조로 받들었다.]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 [[무굴 제국|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 다만 이들이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황실 친위대인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대를 창설하고 카프카스계 맘루크를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키질바시와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로 강제 이주와 회유책을 번갈아가며 이란 내부로 이주시킨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튀르크계 키질바시 귀족, 페르시아계 관료 사이 제3세력을 형성하며 16세기 초중반의 길고 험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아바스 대제 시절쯤 와선 안정적인 중앙 집권을 마련할 기반이 되었다. 카프카스인 납치와 강제 이주로 사파비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구 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문화, 사회적으로도 이 시절 사파비조의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대규모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같은 카프카스 소왕국들 본토는 작살난 반면 타브리즈, 이스파한 같은 이란 내륙지방의 도시에 번영하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커뮤니티가 생기기도 했다.[* 다만 조지아인의 경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도들과 다르게 거의 무조건 시아파로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체르케스와 다게스탄 일대의 순니파 무슬림들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렇게 급진적인 종교적 열망에 기반한 투르코만([[오우즈]]) 전사 부족집단의 힘을 입으면서 성장하고 나서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계 피정복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건 오스만이나 사파비조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파슈툰족|아프간족]]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고 일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역관광?~~ 그러나 이후 다시 ~~나디르 샤가~~ 본진으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복수해서 설욕한다.] 그리고 적어도 오스만은 몰라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벡에겐 전반적으로 대단한 강세였다. [[헤라트]], [[칸다하르]] 같은 중요한 [[호라산]]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훗날 [[아프가니스탄]]에 이란의 영향이 짙게 남은 것도 사파비 시절 확장의 영향이 크다. 은근슬쩍 '이란 종족주의'와 '아케메네스 왕조', '사산 왕조'를 동경했어도,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혹은 아예 몽골계에게 지배당했던 사산조 이후 이전 페르시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열망을 현실화하며 등장한 이슬람 이후 최초이자 마침내 부활한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